본문으로 이동
주 메뉴
주 메뉴
사이드바로 이동
숨기기
둘러보기
🏠 Main
📅 오늘의 역사
📝 최근 바뀜
🎲 임의 문서
콘텐츠 모음
📂 분류 둘러보기
🔎 모든 문서 보기
편집 도구
📤 파일 올리기
⚙️ 특수 문서
🔗 외부 링크 검색
❗ 필요한 문서
사용자
👤 내 사용자 문서
💬 내 토론 문서
⭐ 주시 문서
📚 내가 쓴 글
⚙️ 환경 설정
도움말
❓ 도움말
미디어위키
검색
검색
보이기
로그인
개인 도구
로그인
로그아웃한 편집자를 위한 문서
더 알아보기
기여
토론
동학 농민 혁명
편집하기 (부분)
문서
토론
한국어
읽기
편집
원본 편집
역사 보기
도구
도구
사이드바로 이동
숨기기
동작
읽기
편집
원본 편집
역사 보기
일반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
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
특수 문서 목록
문서 정보
보이기
사이드바로 이동
숨기기
경고:
로그인하지 않았습니다. 편집을 하면 IP 주소가 공개되게 됩니다.
로그인
하거나
계정을 생성하면
편집자가 사용자 이름으로 기록되고, 다른 장점도 있습니다.
스팸 방지 검사입니다. 이것을 입력하지
마세요
!
=== 북접 === 북접은 [[충청북도]] [[보은군]]과 충북 이북 지방의 파벌로 법포 또는 좌포라고도 불렸다. [[최제우]]의 정통 직계를 자처하는 집단으로 대도주인 [[최시형]]과 [[손병희]], [[손천민]] 등이 속했다. [[충청북도]] [[보은군]], [[논산군]] 일대에 영향력을 미쳤다. 당시에 동학의 주요 지도자였던 오지영의 진술에 따르면, 최시형은 호남의 전봉준과 호서의 서장옥은 나라의 역적이고 [[사문난적]]이다 라 규정하고, 동시에 남접의 농민군을 칠 예정이었다.<ref name="gul1996">양필승, 세계사 속에서 전봉준:한국민족주의의 형성과 문명사적 위기, 중앙일보 WIN, 1996년 7월호</ref> 당시 남접의 지도자인 [[김개남]] 등은 조선 정부를 부정하고 스스로 개남국왕(開南國王)이라 칭하였다. [[최시형]] 이하 북접 지도부는 포교의 자유를 얻는 데에만 관심이 있었다. 1차 봉기 때에도 북접은 참가하지 않았다.<ref name="parkus259">박은봉, 《한국사 100장면》 (가람기획, 1993) 259페이지</ref> 남접과 달리 북접은 중농 이상이 많아 개혁에 관심이 없었다.<ref name="parkus259"/> 북접의 목적은 [[최제우]]의 명예 회복과 동학의 포덕 자유 허용이 목적이었다. 북접은 최대한 정치적 문제에서 회피하려 했고, [[흥선대원군]]과의 연결을 탐탁치 않게 생각하였다. 남접이 3차 봉기를 준비하자, 북접은 남접 농민군을 공격하려고까지 했다.<ref name="parkus259"/> 그러다가 그해 [[9월]] [[최시형]]이 제자들의 간곡한 설득을 하면서 참여하게 되었다.
요약:
미디어위키에서의 모든 기여는 다른 기여자가 편집, 수정, 삭제할 수 있다는 점을 유의해 주세요. 만약 여기에 동의하지 않는다면, 문서를 저장하지 말아 주세요.
또한, 직접 작성했거나 퍼블릭 도메인과 같은 자유 문서에서 가져왔다는 것을 보증해야 합니다(자세한 사항은
미디어위키:저작권
문서를 보세요).
저작권이 있는 내용을 허가 없이 저장하지 마세요!
취소
편집 도움말
(새 창에서 열림)